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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축해 내 영혼…

Bless the Lord O my soul
O my soul
Worship His Holy name
Sing like never before
O my soul
I’ll worship Your Holy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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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맛있는 포도를 판다는 포도 농장에 갔다.
주인 아주머니가 포도 맛을 보여주시려, 전혀 다른 맛의 두 포도를 내어 주셨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건, 같은 농장에서, 같은 농부가, 같은 품종의 씨앗을 다른 흙에서 길러 재배한 포도였다. 다른 것은 흙 뿐이었다.

성경에도 마음 밭에 뿌려진 씨앗에 대한 비유가 있지 않던가. 같은 농부가 같은 씨앗을 재배 하더라도, 흙이 다르다면 전혀 다른 열매가 맺힌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

과일 열매에도 숨겨두신 하나님의 비밀, 그의 신묘막측함에 또 한번 놀라기도 했고 말이다.

막으심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그리고 사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답답한 상황을 주심으로 내가 가려던 길을 막으셨을 땐,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심경이 복잡해 지지만, 시간이 지나보면 하나님의 세심한 보호하심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그 ‘늪’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원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다시 가려던 그곳은 늪이다. 영적 침체가 가득한 곳. 좌파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의로움에 취해 사는 신앙인들, 그러나 행위로는 겸손과 온유와 화평과 사랑이 많은 체 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곳.
 
나쁜것만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하나님만 붙잡을 수 있는 귀한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큰 그림이 어떠하신지, 다 알 수 없는 나는 잠잠히 기다리며 따를 뿐.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운동하는 사람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맺어준 열매인 산업화, 자동화, 그리고 전산화 시대가 베풀어(?) 놓은 풍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우리는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시간 속에서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더 많은 일을 처리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공간의 제약, 그리고 유한한 육신의 한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단위시간당 훨씬 많은 생산력을 확보했다 한들, 여전히 내 몸뚱아리를 일정 시간 이상씩 사용 해 줘야 한다. 마치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들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먹어야 살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노동이 일반이었던 세대 속에선 없던 ‘헬스장’ 이라는게 생겨있으며, (‘헬스 트레이너’ 마저도), 우리는 우리의 게으른 욕구를 꺾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몸을 쓰는 일에 투자를 해야만 어느정도 수준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삶의 방식만 조금 달라졌을 뿐, 제한된 시공간과 육신의 한계 속에서는 어찌되었던 몸뚱아리를 움직이고 사용하고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운동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도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필요함을 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정말로 땀을 흘리고 수고를 해야만 하도록 설계되어있음을 깨달아가고 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탄탄한 몸매와 근력, 그리고 땀흘리고 수고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 마치 밥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 꼭 투자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좌파적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사람

좌파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이중적인 사고방식, 이중적인 삶의 방식, 그리고 이중적인 잣대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좌파적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본인 그리고 본인과 뜻을 같이하는 집단의 의견과 판단이 정의롭고 공의롭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그러한 줄을 모른다는 거다. 좌파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 생각을 펼쳐가다 보면, 결국엔 죄인인 인간, 죄인인 나의 모습이 보이지만, 스스로가 그러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좌로나 우로나 감히 치우칠 수 없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내려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길 원한다.

성경적 이성관을 가진 사람

흔히들 남녀문제는 둘만 안다 – 라던가, 둘만이 해결할 수 있다 – 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일’ 혹은 ‘그들의 문제’ 나아가선 ‘다른사람이 감히 신경써선 안될 일’ 이라는 인식이 세상의 경험이 낳은 지혜인듯 하다. 그만큼 워낙 각 사람의 소견대로 만나고, 그들의 소견 속에서 교제하며 일들을 풀어가고, 그들의 소견을 따라 지속적인 만남과 헤어짐의 여부도 정해진다는 말인 듯 하다. 정말이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도 나누어 보면, 정말 이성관에 대한 생각이 중구난방이고, 각자의 삶의 경험에 기초한 소견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성관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건, 성경이 말하고 보여주고 요구하고 있는 이성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남자와 여자에 대해 성경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 만남과 사랑과 섬김과 헌신에 대해 성경적으로 풀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남편과 아내, 결혼과 가정,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 대해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풀어가길 원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고마움을 아는 사람

미안함을 아는 사람

자위 행위가 죄인 이유에 대한 고찰

자위행위가 죄임을 설명하고자 하는 많은 신학적 연구가 있음을 안다. 인터넷을 지나가다 아래 첨부한 기사 글을 보며, 나 또한 나름대로 자위행위가 왜 죄인지에 대해서 생각 해 보기로 했다.

자위행위의 주 목적은 ‘나의 만족’과 ‘나의 쾌감’ 이다. 성경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성을 ‘내’가 아닌 ‘상대’를 위해 내어주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이 ‘상대’는 영원을 사랑으로 약속한 남녀 사이를 전제로 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린도전서 7장 4절)

그러나 요즘 세상의 가르침을 잘 보고있노라면, ‘자신의 만족’을 최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같다. 성관계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자신의 만족에 집중하라’고 하고, 자위가 성관계시 쾌감 증진에 좋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그 하나하나의 가르침들을 다 열거할 순 없지만, 결론은 ‘자기 만족’이다. 계속 ‘나’를 바라보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도 결국은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요, 섹스도, 자위도 결국 다 본인의 만족을 위한 것일 뿐인거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다르다. 내어줌, 순종, 헌신… 이 모든게 한데 엮여 커다란 사랑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이룬다. 결국 나의 성욕과 성적 쾌감인 오르가즘은 내가 계속 추구하며 나의 만족을 위해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상대에게 온전히 내어주고 상대가 온전히 내 몸을 주장하도록 순종할 때, 내게도 선물처럼 찾아오는 육체적 쾌감인 것이다. 마치 나의 모든 걸 주님께 내어드릴 때, 내 삶에 기쁨과 만족이 선물같이 찾아오는 것 처럼 말이다.

오르가즘이 찾아온다는 육체적 열매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그 본질과 방향은 분명 다르다.

나의 만족과 나의 쾌감에 집중된 요즘에는, 문란한 성생활이 난무한다. 책임을 회피하려 피임을 챙기는건 마치 당연한 성관계 매너인양 홍보되기도 한다. 자위행위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책임은 피하면서 나의 만족과 나의 쾌감을 위한 행위. 보기에나 느껴지기에 비슷한 쾌감이라 할지라도 본질에서 벗어나고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파괴시키는 죄악일 뿐이다.

사랑으로 묶인 남녀가 서로의 내어줌을 통해 상대방이 온전히 나를 주장하도록 내어줬을 때 오로지 그 상대방만이 내 몸과 마음과 영혼에 선물해줄 수 있는 쾌감은 마치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모습을 숨겨두신 비밀같은 관계임을, 그 본질을 알아야 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 5장 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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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사실이라면 온 우주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고 한 C.S. 루이스의 말이 공감이 많이 되었다. 실제로도 이만큼 우리에게 심각하게 중요한 일이 없지 않은가. 한국에 와서 잠시 이런 저런 계획들이 막힌 채로 붕 떠버린 상황 속에서 지내어보니,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게된다. 그런데 이게 옳은걸까. 온 우주를 통 틀어서 이토록 중요하고 심각한 ‘복음사건’을 뒤로하고 그냥 살아도 되느냔 말이다. 고민이다.

헬스장에 붙어있는 속옷만 걸치고 있는 남녀의 사진을 보고 한 아이가 계속… “변태, 변태.” 라고 했다. 헌데 그 아이의 어머니 처럼 보이는 여자가 계속 그리고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아니야, 그게 왜 변태야. 변태 아니야~ 괜찮은거야.” 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는 노출과 자극적 옷차림을 괜찮고 괜찮은거라 인식받으며, 훈련받으며, 성장한다. 걱정이다. 그런 아이들이, 그런 부모 슬하에서 하나둘씩 자라나서 앞으로를 이룰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인간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

요 며칠 교황의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어서 끄적여 보기로 했다.
잠깐 반짝 하고 흘러갈 많고 많은 논란들 중 하나이겠거니, 했는데
자꾸 눈에 띄어서 끄적일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처음 저 발언을 접했을 땐,
‘무슨 말같지도 않은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살짝 달라졌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맞는 이야기기도 하고, 동시에 잘못 된 이야기기도 한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
상대를 너무 사랑하고, 아끼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주고싶고,
그렇게 나의 하나뿐인 (목숨과도 같은) 순결과 목숨까지 내어줬다면,
‘나는 너 없이는 안돼. 너 없이는 죽은거나 다름 없어’ 라는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을거다.
그건 진심어린 고백이고 사실일거다.
순결한 사랑에서 출발 한 고백이며, 상대방을 향한 왜곡된 협박이나 구차한 매어달림과는 비슷해 보일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는 고백이다.

그렇게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
그 사람 또한 진정으로 그이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지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이가 고백한 것과 같은 고백이 흘러나오지, ‘너는 나 없이는 안돼’ – 와 같은 이야기가 나올 틈이 없으리라 생각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에게 그분의 목숨과도 같은 순결을 바치신 사랑이다.
우리와 영원한 언약 (곧 혼인과도 같은)을 맺으셨으며,
심지어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과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고백은 ‘나는 너 없이는 안돼. 너 없이는 죽은거나 다름 없어’ 라고 하는 것과 같을거다.
하지만,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의 입에서,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고백이 ‘인간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 라면, 과연 그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았거나, 지식적으로만 알고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나님은 우리와 마치 연인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나누길 원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럴 때만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도 믿는다.
우리와 그런 관계를 시작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고백하셨고, 사랑을 표현하셨으며, 영원한 언약도 맺으셨고,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그 사랑을 온전히 받고, 그 사랑에 온전히 반응할 때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비로소 시작이 될 것이라 생각이 되는데, 과연 ‘너는 나 없이 안되지?’ 하는 말이나 생각이 삶에 묻어져 나온다면, 그것이 사랑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 맞을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간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는게 맞는 얘기 일 수도 있다. 그토록 사랑하신거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더 합당한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셔서 하나님만으로 완전하고 우리가 구지 필요 없으신 분인데도 우리와 맞추어 함께 가길 원하시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주시고 영원히 함께 거할 축복까지 허락 해 주신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이지 않을까.

안으로 굽는 우리의 팔

라이즈업 무브먼트 청소년 예배 캠프를 인도하던 모 목사. 청소년 사역을 잘 해오던 목사가 얼마 전에 모 청소년과 성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었다. 그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 말씀도 잘 선포했을거고, 동시에 지치고 힘들고 상처있는 청소년들을 가까이에서 상담도 해주고, 함께 시간도 보내며 사역했을거다. 그 목사는 사역자였지만 이기적인 자신의 죄성을 다루지 않은 채, 그 자매의 마음을 사기 위해 교묘히 노력했을 것이며, 나 자신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교제 했을것이다. 그 끝에는 그 자매의 몸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기적이고 추악한 면모의 끝을 보인거다. 겉으로는 그 자매를 위하는 듯, 아끼는 듯 보였을지라도, 실제로는 본인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이 교묘하게 얽혀있는 거인거다.

그런데, 이 목사와 달리 ‘성관계만 없었으면’ 잘 하고 있는걸까. 상담하고 사역하는 그 자매와 성관계만 없다면 내가 상담과 사역을 잘 하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척도일까. 우리의 교묘한 이기심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나를 위한,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들로 채워간다. 내 편을 만들고, 나를 좋아하게 만들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고…. 등등.

우리는 이렇게 상대를 위한다면서도 교묘하게 우리를 위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면 예수님은 참으로 상대를 위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지극히 긴장되거나 놀라는 순간 피가 안으로 쏠리며 팔다리가 차가워지고 나아가선 실신까지 하게 되는데 반면 예수님은 그 피를 밖으로 다 쏟으시며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셨다. 우리가 얼마나 뼛속까지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 밖으로 쏟으며 내어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정을 위해서 애쓰지 않으셨다. 호감을 사기위한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깊고도 넓은 그 사랑의 참 모습을 묵상하며, 나의 이기심과 욕망은 죽고 온전히 예수님의 모습만이 사는 삶이 되길.

James Comey 전 FBI director 의 청문회를 생방송으로 봤다.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청문회의 품격이 참 우리나라의 것을 보는 때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다.

logged by JaeYo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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