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김일성의 꿈이 이루어지다

김일성은 6·25 정전 직후부터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고 안달했다.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려면 ‘방해꾼’ 한국이 협상 테이블에 없어야 했다. 주한 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파키스탄 등을 통해 ‘직접 만나자’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보냈다. 1977년 북으로 넘어가 격추된 미군 헬기를 3일 만에 돌려보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동맹국 한국을 뺀 미·북 대화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박정희·카터 사이가 아무리 나빴어도 북과 ‘내통’하지는 않았다. 미·북 간 첫 대면은 1988년 12월일 것이다. 베이징에서 미국 대사관의 정무참사관이 국무부 승인을 받고 북 외교관을 만났다. 이는 미국 정책의 근본적 변화라기보다 1988년 7·7 선언으로 시작된 노태우 정부의 ‘북방 정책’이 영향을 준 것으로 봐야 한다. 1993년까지 미·북은 30여 차례 접촉했지만 단순한 입장 교환에 그쳤다.

그 시절 김일성은 다급했다. 동구권이 몰락했고 한·소,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위기를 벗어나려고 핵과 미국에 매달렸다. 1990년 즉각적인 미군 철수 주장에서 물러나 “점진적으로 철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군 유해 5구도 먼저 돌려줬다. 미국과 직접 마주 앉는 기회를 만든 건 결국 핵이었다. 1차 북핵 위기가 곪아가자 미국은 1992년 ‘한국 동의’ 아래 국무부 차관과 김용순 노동당 비서를 뉴욕에서 만나게 했다. 그때만 해도 차관 발언 요지를 우리 측에 미리 알려줬고 후속 회담 일정도 맘대로 잡지 않았다.

한국이 빠진 미·북 협상 결과는 1994년 제네바 북핵 합의가 대표적이다. 북핵은 폐기가 아니라 동결이었고 북에 제공할 동결 대가도 우리가 대부분 지불하는 내용이었다. ‘전쟁 위기론’에 겁먹고 협상권을 섣불리 넘겼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뒤늦게 “북 정권 연장을 도울 뿐”이라고 반대했지만 기차는 떠난 뒤였다. 북 노동신문은 “최대의 외교적 승리”라고 환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 나라 이익을 희생하면서 남의 나라 이익을 챙겨주는 법은 없다. 협상 테이블에 끼지 못했다가 국익이 훼손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2차 대전 승전국으로 참가하지 못해 일제 식민지 배상, 독도 문제 등에서 손해를 봤다. 우리의 중대 국익이 걸린 협상이라면 누가 ‘빠지라’고 해도 ‘어림없는 소리’라고 버텨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정부는 5100만 국민의 안위가 걸린 북핵 협상이 미·북 둘만의 게임으로 흐르는 것을 내버려둔다. 오히려 미·북이 만나기만 하면 평화가 성큼 올 것처럼 선전한다. 평소 ‘자주’를 강조하면서도 북핵 문제에선 이상하리만치 ‘중재자’ 운운하며 미·북 둘이 만나라고 한다. 덕분에 미·북 정상 회담이라는 북 소원이 이뤄졌다. 과거 한국 정부가 3자, 4자, 6자 회담 등 어떤 형태로든 북핵 테이블에 앉으려 했던 것과 대조된다.

북은 선거를 앞둔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미국 중간선거를 보름쯤 앞두고 타결됐다. 작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도 미 선거 5개월 전이었다. 그 결과 없어진 건 북핵이 아니라 한·미 연합 훈련이었다. 내년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는 ‘탄핵 조사’라는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돌파구가 필요한 트럼프와 핵보유국이 목표인 김정은이 만나면 황당하거나 재앙적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지금 한·미 관계가 튼튼한가. 트럼프와 김정은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 이 둘이 만나 북핵을 담판 짓는 자리에 한국은 빠져도 괜찮다는 건 어느 나라 정부인가.